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이스라엘 건국과 중동전쟁

by 에이스토리 2023. 10. 19.
반응형

 

 

영국의 이중 플레이

1차 대전 중인 1915년 10월 영국은 ‘맥마흔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영국이 아랍 지역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랍 국가들을 끌어들여 독일의 공격력을 분산시키고자 하는 책략이었습니다.

 

아랍 국가들은 곧 아낌없는 전쟁 지원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약속이 아랍 하고만 채결된 게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영국에게는 막강한 부를 축적한 유대인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영국은 유대인들이 막대한 전쟁비용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옛 유대인의 땅에 이스라엘 건국을 약속하게 됩니다.

 

이른바 ‘밸푸어 선언’(1917년 11월 2일)이었습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지원을 받은 영국은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하지만 골치 아픈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랍과 유대인들과 체결한 이중 약속으로 영국은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못한 채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결국 영국으로부터 이 문제를 넘겨받은 유엔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두 개의 국가를 각각 건설하라는 절충안을 내놓았습니다.

 

특히, 성지인 예루살렘을 분할하기로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유대인 역시 영국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나치로부터 대량학살까지 당했는데, 돈 주고 산 토지마저 분할하게 되어 울분을 토했습니다.

 

결국 1948년 이스라엘은 국가를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건국

이스라엘 공화국은 유대인이면 간단한 심사를 거쳐 시민권을 발급해 주었습니다. 이를 ‘귀환법(the Law of Return)’이라 합니다.

 

조부모 중 유대인이 있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 모두를 유대인으로 간주했습니다.

 

또 유대인 이민자들과 가족 관계인 비유대인들에게도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귀환법이 전통적인 유대인의 정의보다 일부러 더 광범위하게 정의한 이유는 유대인의 친척들도 외부에서는 유대인으로 여겨 반유대주의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건국 당시 인구는 80만 6천 명이었습니다.

 

 

 

유엔 안을 바탕으로 1948년 5월 14일 금요일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습니다.

 

벤 구리온은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내가 저희를 그 본토에 심으리니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는 뽑히지 아니하리라.
이는 네 하느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모스〉 9장 11절에서 15절이 벤 구리온에 의해 낭독되는 가운데 이스라엘이 독립했습니다.

 

기원전 63년에 망한 지 정확히 2011년 만에 나라를 되찾은 것입니다. 기적이었습니다.

 

 

 

1차 중동전쟁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건국 선언한 그날 밤 이집트 전투기들이 이스라엘을 폭격했고 이튿날 아랍 군의 침입이 시작됩니다.

 

이로써 전 아랍이 전쟁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다섯 개국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북쪽에서는 레바논과 시리아가, 동쪽에서는 요르단과 이라크가, 남쪽에서는 이집트가 공격해 왔습니다.

 

누가 봐도 이스라엘은 곧 무너질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전쟁 초기에 이스라엘 군 약 2만 7천 명과 정착촌 예비군 약 9만 명이 결사항전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여자들이라고 예외가 없었습니다.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신생 조국을 지키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소총 한 자루를 두 사람이 나누어 쓰고, 박물관에 있던 대포까지 동원해서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웠습니다.

 

20일 넘게 끈 전투 끝에 결국 유대인들은 2천 년 만에 어렵게 얻은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1948년 6월 11일 스웨덴의 중재로 휴전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사이 미국의 지원으로 현대적인 전투군대로 변한 이스라엘 군은 모세 다얀 장군의 지휘 아래 이집트 카이로, 요르단 암만,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폭격해 아랍 연합군은 결국 두 손을 들었습니다.

 

이듬해 2월 평화조약 조인으로 전쟁은 끝났고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유엔안보다 50퍼센트나 더 많은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고향에서 축출된 아랍인들은 80만 명이나 됩니다. 이들을 팔레스타인인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요르단, 레바논, 팔레스타인에는 거대한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형성돼 수십 년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팔레스타인 땅인 가자지구는 그 자체로 거대한 난민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 땅에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집트 국경에 맞댄 가자라는 땅으로 쫓겨나 엄청난 인구밀도(약 백만 명)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해 말에 34만 명의 유대인 이민자들이 도착했습니다.

 

1951년 말에는 추가로 34만 5천 명이 와서 유대인 인구는 갑절로 불어났습니다.

 

이들은 주로 아랍 국가 출신들이었습니다.

 

 

 

2차 중동전쟁 뒤 공대공 미사일 개발

1952년 7월에 이집트의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쫓아내고 대통령이 되어 소련과 친선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이 아스완 댐 건설 지원요청을 거절하자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하며 수에즈 운하를 점령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반발해 공군을 동원해 수에즈를 폭격했고 이스라엘도 동맹을 맺고 이집트 시나이 반도를 침공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은 시나이 반도를 침공해, 이집트 군을 격파하고 수에즈 운하를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이 자칫 세계대전으로 번질 위험이 있어 미국과 소련이 압력을 가했고 유엔이 중재해 삼국 군대가 철수하면서 끝났습니다.

 

그 뒤 이스라엘은 미국이 주요 무기의 제공을 거부하고 지원하지 않자 자주국방의 결의를 다집니다.

 

이스라엘 산업화는 방위산업과 그 발달의 궤를 같이했습니다.

 

 

 

이스라엘, 국제적 신뢰를 상실하다

1960년대에 일어난 가장 극적인 사건이 6일 전쟁이었습니다.

 

2차 중동전쟁 후 1964년경부터 아랍 게릴라의 활동이 시작되어, 이들은 골란 고원에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이스라엘 정착촌들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게릴라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집트 나세르는 대군을 시나이 반도에 투입하며 아카바 만의 봉쇄를 선언했습니다.

 

 

 

6월 5일 아침 이스라엘 공군이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이스라엘 전투기들은 이집트의 촘촘한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지중해를 멀리 우회해 리비아 사막지대 상공을 통해 카이로에 침투했습니다.

 

이집트 공군은 MIG-21 90대를 포함해 410대의 항공기를 띄워보지도 못한 채 파괴당합니다.

 

공군 전력의 궤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보다 60배나 많은 이집트 공군력을 파괴하는 데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전란은 시리아와 요르단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튿날인 6월 6일에는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전투기 416대를 파괴해 아랍 측 공군력을 괴멸시켰습니다.

 

 

 

이스라엘 군은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나흘 만에 시나이 반도를 점령해 요르단 강 서안 지역, 시리아 국경의 골란 고원을 공략했습니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6월 6일 즉시 정전을 결의했고, 쌍방 수락에 의해 6월 9일 정전이 실현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지역과 그때까지 이집트가 통치하고 있던 가자지구를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아랍인 부문은 유대인 부문과 통합되었습니다.

 

유대인 정착지들은 일부 점령지 내에도 지어졌습니다.

 

이는 그 이후로 정치적 이슈가 되어왔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을 둘러싼 국제정세도 변화했습니다.

 

3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기습에 의해 거둔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이후에 유지해 온 국제적 동정과 신뢰를 상실했습니다.

 

게다가 이 승리로 중동의 군사적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한 프랑스와 영국은 이스라엘에 무기 관련 금수조치를 취했고 미국도 표면적인 원조는 할 수 없었습니다.

 

 

 

4차 중동전쟁, 탱크가 힘을 못 쓰다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 이집트와 시리아가 각각 수에즈와 골란 고원의 양 전선에서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욤 키푸르’ 전쟁이라 부르는 4차 중동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날은 유대인의 종교 축제일인 ‘속죄일’로 모든 국민이 일을 하지 않고 그동안 지은 죄를 하느님께 기도하며 용서를 청하는 날입니다.

 

 

 

건국 후 세 차례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이스라엘이었지만 이번 전쟁은 시작부터 양상이 달랐습니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과거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잃었던 영토를 되찾기로 결심하고, 차근차근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는 대대적인 이집트 군 개혁과 더불어 대전차 무기와 방공미사일 체제를 대폭 강화해 나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랍에 대한 연이은 전쟁 승리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 인플레를 이유로 방위예산마저 삭감할 정도로 평화무드에 젖어 있었습니다.

 

특히 그해 10월 30일 치를 총선거에 이스라엘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고 개전 당일인 10월 6일은 유대교도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욤 키푸르’였습니다.

 

속죄일을 맞아 많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병영을 떠나 있어 기습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날이었습니다.

 

 

 

이집트 군의 병력은 75만 명, 탱크 3만 2천 대, 소련제 미사일까지 총동원해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병력은 이집트 군의 삼분의 일도 채 안 됐고 무기도 이집트 군의 절반도 안 되는 열세였습니다.

 

 

 

기습당한 이스라엘 군은 사상자가 속출했습니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의 피해는 막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마지노선이라고 자랑하던 시나이 전선의 바레브 라인과 골란 고원이 아랍 군의 공격 앞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특히 지난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인 이스라엘의 전차부대는 이집트 군이 쏘아대는 소련제 미사일과 대전차 화기 앞에 무력했습니다.

 

개전 48시간 만에 이스라엘은 17개 여단이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급해진 쪽은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포위되어 있는 이스라엘에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무려 5,566번의 비행 수송 작전을 펼쳤습니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스라엘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예비군을 포함한 모든 부대를 동원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이스라엘 군 수뇌부는 한꺼번에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보고 전력상 약세로 평가되는 시리아 군과 먼저 싸우고 그런 다음에 이집트 군과 상대하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은 개전 6일 만에 시리아 군에 대한 총반격을 개시해 골란 고원 전투에서 시리아 군 탱크 867대, 차량 3천 대 이상을 파괴했습니다.

 

이로써 시리아 군을 패배시켰습니다.

 

그 뒤 시나이 반도로 이동한 이스라엘 군은 16일 수에즈 운하를 넘어 수에즈 시를 점령함으로써 초반의 패배를 만회했습니다.

 

 

 

10월 25일 유엔은 유엔 군의 긴급 파견을 결정하고 28일 1진이 수에즈 운하에 도착함으로써 4차 중동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이 전쟁에선 소련이 35억 달러를 아랍에 그리고 미국은 22억 달러를 이스라엘에 쏟아부었습니다.

 

이후 아랍 산유국들은 서방에 맞서 석유 수출중단을 선언해 1차 오일쇼크로 세계 경제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반응형

댓글